이미 다른 음악 페스티벌 얼리버드 티켓을 구매했던 나는 톰 요크 단독공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발표한 세 번째 앨범 [Anima]가 모든 상황을 바꿔버렸다. 음악은 톰 요크 솔로 앨범 중 최고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으며 새 앨범 곡이 거의 다 포함된 셋리스트의 유혹은 강렬했다. 마침 공연 좌석도 스탠딩부터 지정석까지 넉넉하게 남아있어 티켓팅 전쟁 없이 예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올림픽공원에 도착해 행사를 3일 앞두고 사라진 지산을 생각나게 했던 제일제면소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씁쓸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공연이 열리는 올림픽홀로 갔다.
공연 초반부에 번역기를 쓴 듯한 한국어 인사는 뜻밖의 웃음을 안겼다.
“좋은 저녁입니다.” → 굿 이브닝을 그대로 번역한 듯
“저는 채식주의자예요.” → 톰 요크가 한국 치킨 좋아한다는 소문은 루머였음 (다른 라디오헤드 멤버들이 좋아했던 듯)
“영어 할 수 있어요?” → 이런 저런 얘기를 건네는 줄 알았으나 멘트는 땡큐가 전부였음
“화장실이 어디예요?” → 이건 영국식 유머?
톰 요크 솔로 앨범들을 열심히 들었다면 더없이 만족스러웠을 공연이었다. 흥얼거리기 좋은 곡들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전자음악과 영상,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멋진 무대였다. 마지막까지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했고 관객들은 타이밍을 잘 캐치하며 몰입과 환호를 반복했다.
중간에 한 번 분노의 액션을 선사하긴 했으나 톰 요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열심히 춤도 추고 웃어 주기도 하고 관객들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고 트림도 하고 앙코르도 두 번 했으니까. 두 시간 십 분간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정석에는 톰 요크 음악에 적응 못 하고 공연 중에 나가는 분이 몇 명 보였다. 톰 요크 최고의 곡 중 하나로 기억될 ‘Dawn Chorus’도 안 듣고 말이다. 설마 크립을 기대하고 오신 건 아니겠죠?
첫 번째 앙코르곡들 끝나고 공연 끝난 것처럼 인사하는 모습에 속아 몇몇 관객이 무대를 떠날 무렵 다시 등장한 톰은 두 번째 앙코르로 ‘Suspirium’을 연주하고 퇴장했다. 7년 전 한국에서 처음으로 라디오헤드 공연을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재미와 여운을 안기고 가신 톰 선생님.
셋리스트
01 Interference [Tomorrow's Modern Boxes]
02 A Brain in a Bottle [Tomorrow's Modern Boxes]
03 Impossible Knots [ANIMA]
04 Black Swan [The Eraser]
05 Harrowdown Hill [The Eraser]
06 Pink Section [Tomorrow's Modern Boxes]
07 Nose Grows Some [Tomorrow's Modern Boxes]
08 I Am a Very Rude Person [ANIMA]
09 The Clock [The Eraser]
10 (Ladies & Gentlemen, Thank You for Coming) [ANIMA]
11 Has Ended [Suspiria]
12 Amok [Atoms for Peace]
13 Not the News [ANIMA]
14 Truth Ray [Tomorrow's Modern Boxes]
15 Traffic [ANIMA]
16 Twist [ANIMA]
Encore
17 Dawn Chorus [ANIMA]
18 Runwayaway [ANIMA]
19 Cymbal Rush [The Eraser]
20 Default [Atoms for Peace]
Encore 2
21 Suspirium [Suspi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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