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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퀸의 음악여행

1991년 3월 Q 매거진, 브라이언 메이 인터뷰. 험난했던 퀸(Queen) 20년사 본문

아티스트/퀸(Queen)

1991년 3월 Q 매거진, 브라이언 메이 인터뷰. 험난했던 퀸(Queen) 20년사

화이트퀸 2018.08.31 21:32

Queen : Happy & Glorious?

다시 전 세계의 지지를 얻고 있는 퀸. 엘리트 록 밴드라 할 수 있는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제법 험난했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름하여 ‘퀸 20년사’라 할 수 있다.


퀸은 모든 면에서 적당함과 거리가 멀다. 노팅힐 게이트에 있는 오피스 인포메이션 벽면에 걸린 액자에는 “퀸은 지난 수십 년을 통틀어 최고의 밴드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20년간 8,462만 장의 앨범과 1억 장 이상의 싱글을 판매했고, 공연 티켓 판매량은 감히 셀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니까. 멤버들은 각각 연간 17억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참고로 기네스북 등재는 1979년 기준으로 로열티 수익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과거 프레디 머큐리가 “사실 나는 온몸에서 돈을 쏟아내고 있다”고 말한 게 농담이 아니었다. 


과시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는 그들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는 브라이언이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수제 기타다. 브라이언이 펠트햄에 살던 시절 아버지와 함께 2년에 걸쳐 제작한 그 기타를 만드는데 쓴 돈은 약 15파운드 정도다. 다른 멤버와 달리 지금도 같은 헤어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브라이언은 감자와 새우 요리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게 신경 쓰며 “그 쓰레기 기타와 관련해 떠도는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내가 지금도 그 기타를 사용하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울 거야. 하지만 그에 필적하는 기타가 없으니까,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Brian May ⓒUniversal Music


브라이언은 대형 스타디움을 채우는 밴드가 된 80년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극복한 상태지만, 많은 돈과 명예도 그때 느꼈던 고통에서 해방해주진 못했다. 그래도 새로운 곡을 많이 쓸 수 있게 되었고, 새 앨범에서 제법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반면에 다른 멤버들은 한 해 동안 여러 문제로 고생을 좀 했다고 한다.


1972년 레인보우 시어터에서 데이빗 보위를 봤을 때 브라이언은 "이런! 이 녀석에게 추월당해 버렸어. 우린 아직 앨범도 내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했다. 지기 스타더스트를 만든 보위의 기세는 퀸의 음악적 구상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린 듯했고, 브라이언은 큰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밴드도 곧 EMI와 계약하고 1973년 7월 데뷔 앨범 [Queen]을 발표한다. 이후 퀸은 모트 더 후플의 오프닝 밴드를 맡게 되며 프레디 특유의 퍼포먼스로 영국, 미국, 일본 등 메이저 시장에서 확실한 눈도장을 찍는다.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 삼천 명 정도 되는 소녀들이 우리를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 갑자기 비틀즈가 된 기분이었지. 밴드가 아닌 아이돌 같기도 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우린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어. (웃음)”


ⓒQueen


하지만 당시 밴드가 정말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은 매니지먼트 계약이었다.


“세 장의 앨범을 냈을 무렵, 사람들은 우리가 롤스로이스를 몰고 다니리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큰 빚을 안고 있었어. 회계사를 통해 우리가 돈을 거의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지. 우리는 단번에 불만을 표출했어. 조명, 음향 회사에 제때 돈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으니까. 사적으로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어. 존은 아이가 생겼는데, 제대로 정산을 받지 못해 좁은 원룸에 살았다니까.”


존 리드를 통해 매니지먼트 문제를 해결한 밴드는 좀 더 여유를 갖고 곡을 쓰게 되었고, 앞으로 엄청난 것을 만들게 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모두 자신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탄생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네 번째 앨범 [A Night At The Opera]는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Bohemian Rhapsody’는 이제 숫자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이 한 곡을 녹음하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총 3주간 스튜디오에 머물렀고, 오페라 합창을 만들어내는 데 1주일이 걸렸다는 것. 그렇게 완성한 곡은 6분에 가까웠기 때문에 영국 BBC 라디오에서 틀어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BBC는 곡 전체를 틀어줬다는 것. 4,500파운드를 들인 획기적인 뮤직비디오와 함께 기세가 오르며 영국 차트 1위에 9주간 머물렀다는 것 등등.


A Night At The Opera ⓒQueen


결과적으로 ‘Bohemian Rhapsody’는 퀸의 세계적 인지도를 확립했고, 치밀하게 구축된 독특한 사운드로 특이한 지위를 얻게 하였다.


“데프 레퍼드 멤버들이 어떻게 그런 보컬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냐고 물어봤어. 우리가 늘 수백 개의 트랙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보통 여섯 개 정도의 트랙을 사용해. 프레디의 리드 보컬을 중심으로 프레디, 로저, 그리고 내가 리드 트랙에 맞춰 함께 노래하곤 했지. 프레디 목소리는 굉장히 날카로우면서도 맑고, 로저는 허스키하고 거칠어. 내 목소리는 조금 가벼운 느낌이지.”


프레디는 자신의 노래가 일회용 BIC 면도기 같은 것이라며 대중이 소비하는 음악에 머무른다는 비판에 쿨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76년 9월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무료 공연에 15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한 퀸은 일회용이 아닌, 최정상급 밴드로 올라섰다는 것을 똑똑히 증명했다.


퀸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음악 매체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 또한 급증했다. 밴드를 조롱하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면 프레디는 인터뷰를 거부하거나 단답형으로 일관하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앨범이 잘 팔리고 있을 때 비평가는 우리 작품을 쓰레기 취급했다니까.”


멤버들은 한동안 서로를 진지하게 미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78년 [Jazz]를 녹음했을 때, [The Game], [The Works]를 만들 때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어. 나는 몇 번이나 밴드를 등지고 떠날 생각을 했어. 그건 나뿐만이 아닌 모두가 그랬던 것 같아. 돈 문제와 관련한 다툼도 끊이지 않았어. 특히 비사이드 곡이 그랬지. ‘Bohemian Rhapsody’ 싱글 판매량이 백 만장이면 로저도 동등한 로열티를 받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지. 왜냐면 비사이드에 로저가 만든 ‘I’m In Love With My Car’가 수록됐기 때문이지. 이런 문제로 몇 년을 다퉜던 것 같아.”


[The Game] 이후 퀸은 미국에서 실패를 이어갔으나 영국에서는 팬층이 더 탄탄해졌고, 인기도 여전했다. 1984년 10월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악명 높은 흑인 자치구 보푸사츠와나 근처의 선시티에서 많은 개런티를 받으며 여덟 차례 공연을 펼쳤는데, 퀸에 적대적이던 매체에 더없이 좋은 표적이 되었다. 퀸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문화에 반기를 든 ‘정치적 의식 없는 밴드’로 불리며 무수한 비판을 받는다.


이에 밴드는 대대적인 항의와 더불어 체념한 듯한 발언을 이어갔고, 공식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퀸이 이렇게까지 비난받을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 공연 수익 일부를 선시티 근처의 흑인 장애인 학교에 기부했고, ANC(아프리카 민족 회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조차 퀸의 ‘I Want To Break Free’를 합창곡으로 골랐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게 6년이 지난 지금, 브라이언 메이는 선시티 공연이 문제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진심으로 반대했어. 거의 1년간 많은 것들을 검토한 뒤 공연을 결정했고, 인터뷰에서도 인종차별에 반대한다고 분명히 얘기했지.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우리를 파시스트라고 생각했지. 이제 그런 비난에 일일이 대응할 여력은 없어. 우리는 분별력을 갖고 행동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지.”


밥 겔도프는 퀸이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보내야 할 존재다. 밥이 ‘라이브 에이드’ 출연을 제의했을 때 퀸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밴드를 설득했다. 


“라이브 에이드의 연주와 사운드 모두 끝내줬어. 지구 최대 규모의 주크박스라는 발상을 완벽하게 이해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게다가 프레디는 그 이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완벽한 무대를 선사했잖아. 그 녀석은 전 세계를 상대로도 뻔뻔하게 쇼를 즐길 수 있다니까.”


밥 겔도프 또한 “각자 취향이 있겠지만 누가 봐도 그날 최고의 밴드는 퀸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Live Aid ⓒQueen


라이브 에이드의 여파는 컸다. 지금까지 발표했던 앨범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86년 투어는 대형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밴드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게 큰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퀸은 로열티 문제도 해결했다. 80년대에 그들은 비사이드 트랙 인세를 누가 작곡했든 상관없이 균등하게 배분하기로 합의했다. 과거 이런 방식이 오히려 밴드의 불화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퀸에게는 매우 합리적인 절충안이었다. 그리고 1989년 [The Miracle]을 만들 때 밴드는 앨범 로열티까지 동등하게 분배했다.



Magic Tour ⓒQueen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한 가장 현명한 일이라 생각해. 작곡가 크레딧을 양보하게 되면 왠지 희생하는 기분도 들겠지만, 함께 곡 작업에 몰두하면서 깨달은 게 많아. 과거엔 내가 만들지 않은 곡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모든 곡에 최선을 다하지. 적합한 싱글을 선택하는 일은 훨씬 수월해졌어. 고민도 많이 줄었고. (웃음)”


퀸은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하다. 프레디는 최근 투어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바꿨다. 오랜 불화마저 털어버린 밴드의 현재는 매우 긍정적이다. 브라이언은 최근 몇 년간 초기부터 거의 없었던 단결력을 느꼈다. 여러 루머로 밴드를 흔든 타블로이드에도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을 정도다.


“진심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것 같아. 지금이 가장 안정적인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 


퀸은 곧 스위스 몽트뢰에 있는 자신들의 스튜디오로 돌아가 새 앨범을 작업할 것이라고 밝혔다. 앨범 [Innuendo]를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밴드의 넘치는 에너지를 억누르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1991년 3월 Q 매거진 내용 일부를 발췌해 번역


화이트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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