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면서 학창 시절이 그리웠던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학생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겨울방학’만큼은 엄청나게 부러워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직장인들이 크리스마스 전후로 딱 2주만 겨울방학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불현듯 한다. 심지어 내게 그런 황금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최소 이틀은 따뜻한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음악만 듣겠다는 계획까지 세운다. 이게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게 사실이다.
이렇게 겨울방학을 꿈꾸는 것과 더불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살펴보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눈이 내리기도 전에 겨울에 들어야 맛이 나는 음악들을 대폭 추가시켜뒀기 때문이다. 거기엔 대다수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겨울 음악인 ‘크리스마스 캐롤’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왬!(Wham!)의 <Last Christmas>나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굳이 챙기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이지만, 매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된다. 익숙하고 편안한 음악들을 일상에 배치하는 과정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는 것처럼 즐겁고 설레기 때문이다.
겨울이 오면 늘 듣게 되는 앨범들
앞서 ‘익숙하고 편안한 음악들’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낯설지만 겨울과 잘 어울리는 음악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12월호 <팝스팝스> 주제도 ‘겨울과 어울리는 히든 트랙들’이다. 따라서 애써 찾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롤과 히트곡은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사실 오래 전부터 겨울과 잘 어울리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음악들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땐 여름이었다. 그래서 12월이 더 반갑게 느껴진다. 수북이 쌓인 음반들을 뒤적이며 고른 열 개의 특별한 겨울 음악들을 지금부터 소개한다.
01 Belle & Sebastian (Feat. Norah Jones) - Little Lou, Ugly Jack, Prophet John
스코틀랜드 출신의 7인조 인디 팝 밴드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이 2010년에 발표한 앨범 「Belle And Sebastian Write About Love」에 수록된 곡이다.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노라 존스(Norah Jones)는 밴드와 함께 담백하면서도 우아한, 그리고 따뜻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겨울에 최적화된, 낭만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곡이다.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추운 겨울날, 아늑한 공간에서 따뜻한 차 한잔 앞에 두고 이 곡을 들으면 4분이 4초처럼 느껴질 것이다.
02. Boyz II Men – Will
보이즈 투 멘(Boyz II Men)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 1990년대에만 11개의 톱 텐 히트곡을 배출했고, 미국 내 앨범 판매량은 2500만장을 넘겼다. 하지만 2000년에 발표한 「Nathan Michael Shawn Wanya」 앨범부터 보이즈 투 멘은 뚜렷한 하향세를 보였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정규 앨범보다 더 많은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End Of The Road>나 <I'll Make Love To You> 같은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쉽지만, 보이즈 투 멘은 변함없이 아름다운 화음과 환상적인 호흡을 과시하고 있다. 나카시마 미카(Nakashima Mika)의 곡을 리메이크한 <Will>은 2005년 일본에서만 발매된 스페셜 앨범 「Winter/Reflections」에 수록되었다. 앨범은 1년 뒤 한국에서도 발매되었지만,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원곡보다 묵직하고 감미로운 느낌이 있는 보이즈 투 멘의 <Will>은 겨울이 깊어질수록 더 많이 찾게 되는 두툼한 외투처럼 포근하다. 보이즈 투 멘은 이에 앞서 「Christmas Interpretations」라는 캐롤 앨범도 냈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겨울 노래는 <Will>이다.
03. Eels - Beautiful Freak
미국 밴드 일스(Eels)의 사운드는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다. 고요할수록, 그리고 어두울수록 더 듣기 좋은 일스의 음악은 희미하면서도 아름다운 빛을 반짝인다. 최근 부쩍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본능적으로 일스의 음악을 들었더니, 입고 있던 얇은 옷이 두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스의 데뷔작 타이틀과 동명인 <Beautiful Freak>는 히트곡 <Novocaine For The Soul>, <Susan's House> 등에 밀려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추운 겨울과 잘 어울리는 몽환적이고 따뜻한 발라드다. 또한 헤드폰으로 혼자 즐기면 좋은 위로가 되고 따뜻한 실내에서 몸을 녹이며 연인과 함께 들으면 더없이 낭만적인 러브송으로, 노랫말은 영화 ‘슈렉’과 너무 잘 어울린다. 일스와 겨울, 어둠의 궁합은 실로 환상적이며 <Beautiful Freak>는 그것을 대표할만한 곡이다.
04. Elbow - Lay Down Your Cross
영국 밴드 엘보우(Elbow)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적은 없지만, 엘보우의 음악을 듣고 실망했던 적 또한 없다. 10년간 다섯 장의 앨범을 낸 엘보우는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베스트가 아닌 B-Side 모음집을 선택했다. 그게 올해 발매된 「Dead In The Boot」라는 앨범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 대부분은 낯설지만, 퀄리티는 매우 뛰어나다. 음악들은 어두우면서도 우아하고, A-Side 싱글보다 오히려 더 자연스럽기도 하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문턱 사이에 위치한 느낌을 주는 곡들은 특히 인상적인데, 대표적으로 <Lay Down Your Cross>를 손꼽을 수 있다. 2004년 <Not A Job> 싱글 B-Side로 수록된 이 곡은 엘보우의 신곡이라고 우겨도 많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들으면 좋을 곡이다.
05. Fleet Foxes - White Winter Hymnal
<White Winter Hymnal>은 미국 인디 포크 밴드 플릿 폭시즈(Fleet Foxes)의 데뷔 싱글이다. 여름 음악의 대명사인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 같은 느낌으로 훈훈한 겨울 분위기를 내는 이 곡은 한번만 들어도 기억할 수 있는 코러스가 인상적이다. 깊고 순수한 멜로디와 코러스, 포크 뮤직의 감성과 열정으로 대중과 평단을 사로잡은 플릿 폭시즈의 음악은 사실 어느 계절에 들어도 좋지만, <White Winter Hymnal>은 특히 겨울과 잘 어울린다. 또한 미국 차트에서 77위까지 오른, 겨울 히든 트랙 최고의 히트곡(?)이기도 하다.
06. Hard-Fi – Move On Now
<Move On Now>는 영국 인디 록 밴드 하드 파이(Hard-Fi)의 2005년 데뷔작 「Stars On CCTV」에 수록된 유일한 발라드다. 적은 제작비로 완성된 데뷔작은 독창성과 잠재력을 인정받았고, 영국 음악지 NME가 선정한 ‘2005년을 대표하는 앨범들’에도 포함되었다. 피아노 중심의 구슬픈 소울 발라드인 <Move On Now>는 하드 파이의 음악적 다양성을 엿볼 수 있는 곡이다. 늦은 가을, 그리고 매서운 겨울과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이 몽환적인 곡은 칠흑 같은 밤처럼 어두우면서도 신비한 매력이 있다.
07. Klaatu – December Dream
1973년 결성된 캐나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클라투(Klaatu)는 대중에겐 낯선 이름이다. 재결성한 비틀즈(The Beatles)가 클라투라는 이름으로 녹음한 곡이라는 루머 덕분에 데뷔 싱글 <Sub-Rosa Subway>가 약간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서 클라투는 대중과 점점 멀어졌다. 1981년에 발표한 <December Dream>은 클라투의 마지막 정규 앨범 「Magentalane」에 수록된 존 레논(John Lennon) 추모곡이다. 우리 정서에 맞는 이 애절한 발라드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클라투의 곡으로 소수의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었다. 그리움에 사무쳐 당장이라도 흐를 것 같은 눈물을 머금고 쓸쓸한 겨울 밤 거리를 혼자 거니는 한 남성의 모습이 연상되는, 슬프면서도 예쁜 선율을 가진 곡이다.
08. Maximilian Hecker - Lonely In Gold
섬세한 목소리로 슬픔을 노래하는 독일 출신의 뮤지션 막시밀리안 헤커(Maximilian Hecker)는 한국에서 인기가 높다. 꽤 많은 음악들이 한국의 영화와 방송, CF에 쓰였고, 덕분에 미국과 영국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앨범들도 한국에서 모두 발매되었다. 팔세토 창법으로 차분한 발라드를 많이 들려준 막시밀리안 헤커는 겨울과 매우 잘 어울리기 때문에, 오히려 한 곡을 고르는 게 더 어렵기도 했다. 참고로 <Lonely In Gold>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I’ll Be A Virgin, I’ll Be A Mountain>, 깊은 숨소리가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은 <Snow White> 같은 강력한 후보곡을 제치고 선택했다. 막시밀리안 헤커가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하고 2010년에 발표한 「I Am Nothing But Emotion, No Human Being, No Son, Never Again Son」은 예전 같은 반응을 얻진 못했지만, 오히려 더 간소해진 사운드를 선보인 자기고백적인 앨범이다. 그 앨범의 엔딩 트랙으로 수록된 <Lonely In Gold>는 지독한 외로움을 처연한 멜로디로 채색한 느낌이다. 심술궂은 바람은 불지 않는, 그냥 깔끔하게 추운 한겨울에 이처럼 느리고 잔잔한 곡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은 화사할 것 같다. 차가운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막연히 누군가를 기다려도 행복할, 외롭지만 살가운 속삭임이다.
09. MGMT - Siberian Breaks
2007년에 데뷔한 미국 밴드 엠지엠티(MGMT)는 굉장히 인상적인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상업적으로는 히트곡 <Time To Pretend>와 <Kids>를 탄생시킨 1집 「Oracular Spectacular」가 더 성공적이었고, 음악적으로는 사이키델릭한 성향이 더 짙어진 2집 「Congratulations」가 더 성공적이었다. 특히 두 번째 앨범에는 엠지엠티의 야심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겨울과 어울리는 히든 트랙으로 선택한 <Siberian Breaks>는 2집 「Congratulations」에 수록된 12분이 넘는 대곡이다. 멜로딕한 신스팝의 친근함과 록 뮤지컬의 짜릿함, 네오 사이키델리아의 황홀함까지 모두 갖춘 이 곡은 아주 특별한 겨울 음악으로도 손색이 없다. 크리스마스 캐롤과 스탠더드 팝이 지겨워질 즈음에 들으면 더 좋은 곡이다.
10. Rodriguez – Cause
개인적으로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은 2012년 최고의 음악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 다큐멘터리는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손님들을 등지고 노래했던 무명 가수 로드리게즈(Rodriguez)를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당시 로드리게즈는 2장의 앨범을 발표했지만, 미국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이후 그는 뮤지션이 아닌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미국에서 여섯 장이 팔렸다는 데뷔작 「Cold Fact」(1970)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우연히 퍼진 뒤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끔찍한 인종차별정책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있었다. 외국 공연은 무조건 불가였고, 음반도 모두 검열에 걸려 폐기되었다. 그때 퍼진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저항운동의 시작이자 탈출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로드리게즈는 이 사실을 몰랐고, 수익배분도 받지 못했다. 대신 무대 위에서 분신자살을 했다는 등의 좋지 않은 소문만 무성했다. (사실유무는 다큐멘터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서칭 포 슈가맨은 음악만으로도 충분한 충격을 안긴다. 이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면 1970년대 밥 딜런(Bob Dylan) 부럽지 않은 엄청난 음악들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1971년 발매된 로드리게즈의 2집 「Coming From Reality」에 수록된 <Cause>는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두고 직장을 잃었다는 슬픈 노랫말로 시작되는 뭉클한 곡이다. 밥 딜런의 지성과 도노반(Donovan)의 감성을 모두 가진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아주 특별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이건 겨울이 가기 전에 꼭 들어봐야 한다.
Bonus. 다섯 개의 크리스마스 히든 트랙
01. Coldplay - Christmas Lights (Digital Single)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가 깜짝 선물처럼 안긴 크리스마스 싱글로 로맨틱한 감성보다는 훈훈한 느낌이 더 강하다.
02. OneRepublic - Christmas Without You
<Apologize>로 유명한 원리퍼블릭(OneRepublic)의 크리스마스 싱글이다. 밴드의 감성이 잘 드러난 멋진 곡이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03. Sara Bareilles - Love Is Christmas
2011년에 들은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캐롤이다. 사라 바렐리스(Sara Bareilles)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상업주의가 아닌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 사랑을 돌아보자는 뜻에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04. Sarah Brightman - Arrival
사라 브라이트만 특유의 화려하고 신비한 느낌이 잘 살아있는 곡이다.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도 생각난다.
05. Silje Nergaard - The Very First Christmas Without You (If I Could Wrap Up A Kiss)
실예 네가드(Silje Nergaard)가 선사하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크리스마스 캐롤이다. 깊은 겨울을 만끽하고 싶은 늦은 밤, 최고의 배경음악이 되어줄 것이다.
하이닉스 웹진 하이진 2012년 12월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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