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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황제로 불리는 두 남자가 있다. 존 레논(John Lennon)이 늘 최고라 외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는 로큰롤의 황제,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가 천부적 재능을 가진 친구로 회상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팝의 황제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장르와 세대를 초월한 음악들은 변함없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기념 앨범 출시와 헌정 행사가 반복되고, 잊을만하면 생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특히 음반산업이 급격하게 위축된 21세기에도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기록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이클 잭슨이 대중음악 시장에서 여전히 매력적이고,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Viva Elvis / Immortal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는 2010년대를 맞이하여 로큰롤과 팝의 황제를 되살려낸 야심작을 공개했다. 2010년 2월 19일 초연 후 극찬을 받은 「Viva Elvis」는 엘비스 탄생 75주년을 기념한 작품이다. 엘비스의 마지막 7년에 포커스를 맞췄고, 지금도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2011년 10월 2일부터 시작된 「Immortal」은 퍼포먼스를 극대화한 마이클 잭슨 트리뷰트 쇼로, 지구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엔터테인먼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현재 미국 전역을 돌며 투어 중이고, 10월 12일 런던을 시작으로 유럽 투어를 펼친다. 공연에 사용된 음악들은 각각 앨범으로도 발매되어 팬들을 기쁘게 했다. (비틀즈 멤버들이 변수지만) 뮤지션 사후 수익 1, 2위는 당분간 엘비스와 마이클이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호 <팝스팝스>에서는 추억의 스타가 아닌, 지금도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이클 잭슨이 남긴 위대한 음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Sony Music

1부: 로큰롤을 세상에 알린 엘비스 프레슬리
1935년 미시시피에서 태어난 엘비스 프레슬리는 수줍음 많고 신앙심이 깊은 청년이었다. 흑인 음악을 즐겨 들었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1954년 <That’s All Right Mama>를 녹음했고, 그것은 음악사에 남을 중요한 기록이 됐다. 엘비스는 ‘흑인의 목소리와 감성을 가진 백인’이었고, 세계를 놀라게 한 최초의 록스타이며 섹스 심벌이었다. 그가 양다리를 벌리고 격정적으로 몸을 흔들면 10대 소녀들은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 잘생긴 외모와 상반되는 반항적인 이미지로 고상한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1956년부터 58년까지 미국에서만 4장의 1위 앨범과 7개의 1위곡을 포함한 16개의 Top 10 싱글을 쏟아냈다. 대중음악 중심에 섰던 스탠더드 팝과 재즈는 로큰롤의 거센 열풍에 밀려 고전했다. 때맞춰 신설된 그래미 어워드는 성인 취향의 음악들을 후보에 올리며 로큰롤을 견제했다. 오죽했으면 최근 모 방송에서 DJ 김광한 선생님이 “그래미는 엘비스를 죽이려 만든 상”이라고 얘기했을까. 그러나 보수적인 그래미도 4회 시상식이 열린 1962년부터 로큰롤을 받아들였다. 시상 분야에 베스트 로큰롤 레코딩이 추가된 것. 그렇지만 엘비스는 그래미와 큰 인연이 없었다. 공로상을 수상했고, 록이 아닌 가스펠로 3개의 트로피를 가져간 게 전부였다.


반항적인 몸동작으로 로큰롤 열풍을 주도했던 엘비스 프레슬리 ©Sony Music

기성세대에게 엘비스는 선정적이고,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나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58년 엘비스는 군 입대로 활동을 멈추게 된다. 엘비스를 설득한 건 육군 대령 출신의 매니저 톰 파커(Tom Parker)였는데, 그는 입대를 계기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엘비스 음악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반항적인 이미지를 버리고 기성세대를 끌어안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1960년 군복무를 마치고 활동을 재개했을 때 엘비스는 달라져있었다. 느긋한 스탠더드 팝을 노래했고, 로커에서 대중가수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할리우드 진출을 우선시했고, 레코딩 대신 영화에 출연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1962년부터 69년까지 거의 매년 3편씩 영화를 찍었고, 정규 앨범이 아닌 사운드트랙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기는 조금씩 하락했고, 1966년부터 3년간 Top 10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공연을 하지 않아 가수로서의 힘은 약해졌다. 스타성에 의존한 영화와 음악도 갈수록 평범해졌고, 엘비스는 큰 슬럼프에 빠졌다.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늘어난 체중 때문에 매력적인 외모를 상실하게 됐다. 로큰롤 황제는 그렇게 무너지는 것 같아 보였지만, 1968년 NBC TV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된 ‘Comeback Special’ 공연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후 음반과 공연으로 인기를 회복했지만, 1973년 이혼 후 건강은 점점 악화됐다. 은둔이 길어졌고, 방탕한 생활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간 처절한 외로움에 시달린 로큰롤 황제는 1977년 8월 16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아 루머가 난무했지만, 전세계 팬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바꾼 인물이 엘비스 프레슬리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수많은 편집 앨범들이 발매됐고, 2000년대에는 그의 예전 곡들이 영국에서 다시 인기를 끌며 20곡이 영국 차트 Top 5에 들었다. 이때 4곡이 차트 1위를 기록하며 엘비스는 비틀즈(The Beatles)를 제치고 영국에서 가장 많은 1위곡을 보유한 아티스트가 됐다. (총 21곡) 또한 지금까지 5억장이 넘는 앨범을 판매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평단은 엘비스의 기록을 넘어설 솔로 아티스트는 마이클 잭슨 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1위곡을 보유한 아티스트가 된 엘비스 프레슬리 ©Sony Music

반우영 작가와 나눈 엘비스 이야기
잡지, 웹진 등에 감각적인 글들을 연재하며 활동중인 반우영 작가와 짧은 인터뷰를 가졌다. 반작가의 닉네임은 반구달, 나이는 갓 서른을 넘겼고 성별과 몸무게는 비밀이다. 신비감 유지? 정답이다. 반작가는 앉으나 서나 글 생각하고, 시간만 나면 글을 쓴다. 본래 음악에는 문외한이었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사귄 애인 덕에 알게 된 한 음악 사이트를 통해 각종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그때 음악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것과 도저히 못 듣겠는 음악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특정 장르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목소리와 악기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고 시대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을 좋아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반작가와 나눈 엘비스 이야기를 지금부터 공개한다.

윤태호(이하 윤). 엘비스 프레슬리는 로큰롤 황제로 불리지만, 느끼한 팝 가수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작가님에게 엘비스는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나요.
반우영 작가(이하 반).
엘비스 프레슬리를 처음 만난 것은 영화 속에서였습니다. 진짜 엘비스가 흑백TV 브라운관 속에서 열정을 다해 공연하고 있었죠. 방송국 세트 무대 장면이 TV에서 흘러나오는 걸 주인공(들)이 보고 있었어요. 정확한 영화 제목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긴, 엘비스가 대세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많이들 넣었던 것 같네요. 어쨌든 그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뒤져보고서야 그가 엘비스였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검고 크게 빗어 넘긴 머리 스타일, 희고 반짝이며 펄럭이는 남다른 의상, 높은 깃, 그러나 무엇보다 제 뇌리에 남은 것은 그의 눈이었습니다. 잘은 몰라도 슬퍼 보였어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엘비스의 전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와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강인한 남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의외로 그는 매우 감성적이고, 또한 여렸습니다. 슬픔을 거뜬히 이겨낼 만큼 견고한 내면이 없었습니다. 약물복용도 그런 이유가 작용했겠죠. 하지만 저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엘비스가 수많은 히트곡을 내고, 사람들의 감성을 두드리는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을 표현하고 승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고요.

윤. 엘비스의 편집 앨범은 지겨울 정도로 많습니다. 1위곡을 모은 앨범, 러브송을 모은 앨범, 영화 음악을 모은 앨범, 크리스마스 캐롤을 모은 앨범, 라이브를 편집한 앨범 등 종류도 다양하죠. 여기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반.
죄송하지만, 목록 중에는 없네요. 저는 엘비스가 부른 가스펠 모음집을 으뜸으로 꼽겠습니다. 최근에 발매된 앨범인데 지금까지 들어봤던 음악 중 제일 좋았어요. 엘비스는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 다니면서 그곳에서 노래를 했어요. 청중을 향해 처음으로 노래한 곳이 바로 교회였던 셈이죠. 그래서인지 엘비스가 부르는 가스펠은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울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진심을 다해 불렀다는 느낌도 들고요. 저는 종교가 다른데,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위로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특히 힘들고 지칠 때는요. 힘과 열정을 다한 공연, 수많은 시선을 뒤로 하고 엘비스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기타를 들고 가스펠을 잔잔히 흥얼거리는 상상을 하며 들어보신다면 좋을 것 같네요.

윤. 최고라 생각되는 엘비스의 노래 3개만 골라주세요.
반.
앨범은 가스펠 모음집을 꼽았지만 엘비스의 명곡들을 뒤로 할 수는 없겠지요? 3곡을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제 나름으로는 엘비스 음악을 ‘블루스 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엘비스를 로큰롤의 황제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블루스와 록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루스에 있는 찰진 리듬과 선율이 록의 당차고 경쾌한 울림과 만나서 엘비스만의 음악이 탄생했죠. 결국 로큰롤 계보에 블루스도 록도 다 포함되긴 하지만, 특히나 엘비스는 블루스와 록이 만나서 이루는 절묘한 화합을 이끌어낸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꼽은 3곡은 아무래도 그런 묘미를 잘 알 수 있는 곡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Heartbreak Hotel>, <All Shook Up>, 그리고 <Hound Dog>입니다. <Hound Dog>은 워낙 유명한 곡이긴 하지만, 코러스와 악기들의 세션, 박수소리까지 완벽한 ‘블루스 록’이랍니다.

윤. 당시 로큰롤은 젊은 에너지와 낭만으로 대중을 유혹했습니다. 특히 굴종에 길들여진 비겁한 기성세대에게 반항하는 이미지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죠. 물론 현대의 로큰롤은 그때와 많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젊은이들이 옛날 로큰롤을 즐기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반.
그때 로큰롤을 즐겼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었잖아요? 지금 젊은이들이 옛날 로큰롤을 즐긴다면 기성세대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될 것 같아요. 요새 셔플댄스가 유행한다죠? 광고에도 나오고. 광고에선 댄스만 부각되고 셔플 음악이 부각되지 않아서 좀 아쉽긴 했는데, 알고 보면 셔플은 기성세대가 도저히 엄두도 안 낼 법한 음악이잖아요. 음악은 편견 때문에 멀리하고, 편견 때문에 애정을 갖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편견을 깬 기성세대가 셔플에 맞춰 춤추듯, 편견을 깬 현 세대가 로큰롤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요, 로큰롤은 옛날 음악이 아니에요. 음악이 나이를 먹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흑흑.

윤. 저도 나이를 먹는 게 억울합니다. (웃음)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Jailhouse Rock>을 부를 때의 야성적인 모습과 <Are You Lonesome Tonight?>을 속삭이는 감미로운 모습 중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나요.
반.
저는 <Jailhouse Rock>을 부를 때의 야성적인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야성적인 모습이라기보다 까불까불 신바람 난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해야겠네요. 당시 유행했던 배바지에 발목 기장 때문인지 다리가 엄청나게 긴데, 그 다리를 또 까딱까딱 하면서 춤추고 노래를 부르거든요. 노래하는 데 중요한 상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을 돋워주는 아주 오묘한 춤입니다. 그러면서 이글거리는 눈빛과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만은 변하지 않죠. 그야말로 제대롭니다.


춤추고 노래하는 엘비스 프레슬리 ©Sony Music

엘비스 프레슬리를 대표하는 10곡
엘비스 프레슬리는 앨범보다 싱글이 더 돋보였던 아티스트다. 입문용으로 가장 적합한 건 편집 앨범이다. 개인적인 취향도 조금 반영해서 고른 엘비스의 대표곡 10개를 지금부터 소개한다.

Heartbreak Hotel (1956)
1956년과 로큰롤, 그리고 엘비스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곡이다. 그가 다리를 흔들며 노래하는 모습이 담긴 흑백 라이브 영상은 지금 봐도 짜릿하다. 당시 스탠더드 팝으로 인기를 끌던 스타들은 이 곡의 세련된 전개와 매력적인 리프에서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Don't Be Cruel / Hound Dog (1956)
11주간 1위 자리를 지키며 40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기록한 더블 싱글이다. 메인 차트는 물론 컨트리, R&B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엘비스를 단순한 로큰롤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도 보여준 싱글이다. 국내에서는 여러 광고에 삽입되어 유명해졌다.
Love Me Tender (1956)
낡은 LP로 듣던 <Love Me Tender>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잡음이 거슬리지 않는, 전형적인 ‘추억의 팝송’이었다. 어린 나이에 엘비스와 가까워질 수 있던 계기는 로큰롤이 아닌, 스탠더드 발라드의 힘이었다. 사실 그때는 ‘로큰롤의 황제’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Jailhouse Rock (1957)
이런 히트곡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곡이다. 그를 로커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만든 싱글이기도 하다.
It's Now Or Never (1960)
군 제대 후 달라진 엘비스를 느낄 수 있다. 이태리 민요 <O Sole Mio>의 번안곡으로, 기성세대를 팬으로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곡.
Are You Lonesome Tonight? (1960)
엘비스가 너무 느끼하다고 생각된다면 이 곡도 거북할 것이다. 로맨틱하면서도 쓸쓸한 발라드지만, 옛 청춘 영화의 식상한 대사 중 하나인 “오빠 믿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의 아니게 경고(?)를 한 이유는, 내가 이 곡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Anything That's Part Of You (1962)
미국에서는 별 인기를 끌지 못한 곡이다. (차트 31위 기록) 그렇지만 국내에서의 인기는 다른 히트곡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결정적 계기는 차중락의 번안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히트였다. 가을과 잘 어울리는 제법 세련된 발라드다.
Burning Love (1972)
로큰롤 황제로서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다. 이 경쾌한 곡은 황제의 말년으로 불리는 1970년대도 초라하지만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차트 1위를 놓친 게 조금 아쉽다. (2위 기록)
Always On My Mind (1972)
뒤늦은 인기를 얻은 감미로운 곡이다. 특히 엘비스 사후에 태어난 젊은 팬들이 이 곡을 좋아한다. 유일하게 아는 (혹은 좋아하는) 엘비스 노래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봤다.
A Little Less Conversation (JXL Radio Edit Remix) (2002)
21세기를 맞은 엘비스는 이 리믹스 싱글로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아날로그 팬들의 디지털 전환을 꾀했고, 신세대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후 무수히 많은 편집 앨범들이 쏟아졌고, 로큰롤 황제는 디지털 시장에서도 큰 존재감을 과시하게 되었다. 


Elvis Presley ©Sony Music 

SK 하이닉스 웹진 하이진 2012년 6월호 원고 [ 기사원문 ]